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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이심리칼럼

[가득이심리칼럼]분노하는 자신을 먼저 돌보라.

<분노하는 자신을 먼저 돌보라.>

 

40년을 교회 다니면서 목사와 교인들에게 시집살이를 했다고 하소연한다. 영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방송에도 나오는 목사였는데 목사의 비리와 성추행 등 교인들도 알면서도 묵인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리(非理)’라고 말하는 것이 덜 불편할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비리(非理) 없는 곳이 어디 있느냐?’ 고 오히려 항변을 토해낸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직업에 따라서는 난이도의 차이가 있어서 자격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직업군이 있다. 시험을 치르지 않는 직업군이 있는 반면, 시험을 봐야만 하는 간호사, 의사, 변호사, 회계사, 목사, 신부, 엔지니어링, 전문요리사 등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과정을 통해서 직업군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특히 신앙과 관련된 직업, 직업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사명 없이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실상 모든 직업군이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고 스스로 복을 짓는 일임은 확실하다.

 

목사에 관한 불만의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린다. 그들의 불만에 대해서 듣다보면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가증스럽다는 말까지 표현한다.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준다는 이유로 돈을 요구하거나 헌금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말로써 위협하는 경우를 흔히 듣는다. 생각이 많아지는 이야기다.

 

신앙, 믿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창조주를 믿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따르고 싶은 것일까? 그들만의 편을 구성하기 위함일까? 믿음을 갖고 싶은 것일까?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대부분은 창조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상은 사람과의 소통만을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들, 분노, 억울함, 인정욕구, 사랑욕구 등 어찌 별반 다르지 않는 인간에게 기대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강물에 던져놓고서 자신조차도 꺼내주고 싶지 않는 비굴한 마음같이 보인다. 자신도 자신을 모른 체 하는데, ‘목사라는 근원이 아닌 목사라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어맡기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는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을 한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 안에는 신성함이 있다. 각 종교마다의 교리는 잘 모르겠지만 결국 공통점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고 가장 작은 자(죄와 질병과 어둠이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을 섬기심)에게 선()을 행하며 기본 윤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종교를 깊이 모르지만 서로를 배척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떤 상황에 놓여 져있던 간에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져라. 그것이 곧 자신과의 신뢰이고 창조주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명감 있고 좋으신 목사들을 만나기보다는 그 반대편의 목사를 많이 접했고 실제 비난받으며 이간질 당하는 장본인이 된 경험도 있었다. 이런 저런 것을 떠나서 결국 우린 그 누구도 삶과 죽음이란 실존을 벗어날 수 없다. 그 속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삶에 현재에 충실하며 집중하며 살고 있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가난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고, 힘없고 도움이 끊어진 상태에서의 결핍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결핍된 상황에서 구걸할 만큼 가난한 마음의 상태에서 누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태를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한다. 우리가 어느 누군가에게 마음이나 행위로 도움을 주었다면 그 도움이 순수하였는가? 아니면 대가성을 지닌 도움이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만약 대가성을 바라는 도움이었다면 자명(自明)하지 않음으로 상처를 타인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자명(自明)하지 않았다면 그 마음을 다시 돌봐야 한다. 돌보기 이전에 어느 것도 행하지 않음이 분노하지 않는 길이다.